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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하는 자의 자리 (4) 모여든 사람들이 사회자가 내뱉은 3번 후보의 신상을 파악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크로덴이라고 들렸는데.‘ ‘크로덴이라면 그 미친개?‘ ‘뭐? 미친개가 여길 왜 와?‘ ‘그 놈 최전방에 있는 거 아니었어?‘ 잠시 사이를 두고, 마치 전염병이 퍼지듯 사람들 사이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웅성거림이 공기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관용구는 제각각이었으나 말에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전원이 일치했다. 최전방에 있을 미친개가 이 곳에, 그것도 성황의 추천을 받아 차기 성황 후보로 들어왔다니 그게 말이 되냐. 질 나쁜 농담은 집어치우고 발표나 똑바로 하라며 훈수를 두려 사제 하나가 흥분한 얼굴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불평을 채 쏟아내기도 전에, 한 발 먼저 제.. 2019. 10. 2.
조소하는 자의 자리 (3)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 아! 아!" 태양신의 상징이 서린 단상에 오른 사회자가 마이크를 조절하여 작동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내 아무 문제없음을 확인한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어 목청껏 외쳤다. "다시 선택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새로운 성황을 선출할 때가 온 것입니다! 성국의 새로운 지도자! 영광스러운 태양의 후보자들을 이 자리에 모셨으니 모두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고위 성기사와 사제, 그리고 성황의 추천을 받은 후보의 이름이 적힌 양피지를 받기 위해 사회자의 연설이 잠시 기세를 멈추자, 그 틈을 비집고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흐르고 있었다. 로하의 생각대로. "낙승이로구만." 2층에서 연설.. 2019. 10. 2.
조소하는 자의 자리 (2) 다리가 후들거린다. 살갗을 찌르고 들어와 세포를 하나하나 잡아 뜯는 이 기분나쁜 감촉은 40도를 웃도는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계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때문일까. 역시 이 곳엔 오는 게 아니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 성황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겨우 눌러 삼켰다. 최전방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온 몸을 감쌌던 기세는 일찌감치 바닥을 쳤고, 최전방에 가까워진 지금은 불안을 디딤 삼아 뛰어오르는 방어기제 중 하나 - 즉, 부하들에게 지랄할 힘 역시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다. 안전을 위해 자신을 따라온 소수의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널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다. 여름도 이제 끝물인데 기가 꺾이기.. 2019. 10. 2.
조소하는 자의 자리 (1) 지상에 내린 신의 성총이 저주로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례없는 위세를 떨치던 더위도 끝자락에 다다른 어느 날, 신성국가 디오렌을 다스리는 성황의 저택.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고급 송아지 스테이크와 마튼 산 와인으로 배를 채우고 식후 땡을 겸해 제국 산 최상급 시가를 꺼내든 성황의 주름진 얼굴에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떠올라 있다. 먹고 싶은 것은 언제 무엇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사람도 술도 담배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다. 가끔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발칙한 미물들이 기웃거리고는 있지만, 성국 역사상 가장 일 잘하는 미친개가 전방에 버티고 있는 이상 그 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뭉클리아 놈이 가끔 속을 긁어놓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기도 하고... 성국의 모.. 2019.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