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URODEN/미친개(fanfic)

조소하는 자의 자리 (2)

by 부야카샤 2019. 10. 2.

다리가 후들거린다.

살갗을 찌르고 들어와 세포를 하나하나 잡아 뜯는 이 기분나쁜 감촉은 40도를 웃도는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계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때문일까.

역시 이 곳엔 오는 게 아니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 성황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겨우 눌러 삼켰다.

최전방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온 몸을 감쌌던 기세는 일찌감치 바닥을 쳤고, 최전방에 가까워진 지금은 불안을 디딤 삼아 뛰어오르는 방어기제 중 하나 - 즉, 부하들에게 지랄할 힘 역시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다.

안전을 위해 자신을 따라온 소수의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널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다.

여름도 이제 끝물인데 기가 꺾이기는커녕 더욱더 맹위를 떨치는 이 저주받은 장소 따위 내버려두고 저택으로 돌아가 얼음을 가득 담근 브랜디를 들이키고 싶었다.

-내가 대체 말년에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곳까지 직접 발을...

...들여야 하느냐고 무심코 울분을 터뜨릴 뻔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다.

맞다. 그 자식 때문이었지.

한 순간이라곤 해도 로하 놈의 배신을 잊다니.

내쉬는 숨은 마기와 열기가 뒤엉켜 기운을 빼앗는 독기가 되어 흩날리고, 독기는 바람을 타고 퍼져 하늘을 핏빛으로 채우며, 흡사 피와 같은 홍색의 내음을 다시 들이마시는 이 곳의 마력이 상황판단능력을 앗아간 것이 틀림없다며 성황은 내심 이를 갈았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남이 평생을 누리던 달콤한 열매를 빼앗다니,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라고.

태양신께서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저주를 퍼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젠가, 저와 똑같은 놈에게 통수를 맞아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다음 암살자든 반란군이든 누구든 좋으니 놈을 저주하는 자의 칼에 맞아 죽는 꼴을 두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대하려는 건 아니다.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다가는 로하가 죽는 꼴을 보기보다 먼저 성황의 장례를 치러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로하에게 직접 덤빌 수도, 기다릴 수도 없는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실력이 출중한 자와 손을 잡아 성황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놈에게 대항하는 것 뿐.

그렇다. 모든 것은 남의 뒤통수를 쳐놓고 제 배만 불리려는 로하의 타도를 위한 것이다.

그 거물급 왕재수탱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그만큼의 각오를 세워야만 한다.

난생 처음 방문하는 마계의 틈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생지옥을 방불케 한다는 사실은 계산 외였으나, 이미 발을 들인 이상 이제 와서 꽁무니를 빼는 것도 여의치 않다. 이미 물을 엎지르고 말았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미친개를 불러와라.”

 

성황은 전령을 보낼 것을 명했다.

미친개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벽히 수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괴팍한 녀석이다. 지금 막사로 가봤자 어차피 부재중일 터.

분명 제일 앞에 서서 충직하게 틈을 지키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으니 차라리 지금 전령을 보내는 것이 그나마 덜 기다릴 수 있는 수일 테지.

물론, 성황이라고 딱히 미친개와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황은 그저 - 어서 미친개를 자기편으로 만든 다음,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생지옥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아직 도착도 하기 전인데, 성법을 썼다고는 해도 솔직히 근처에 온 것만으로도 벌써 지쳐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 심정이다.

만약 전방에 서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 곳에서 단 1시간만이라도 근무를 섰다간 기가 쭉쭉 빨려 단박에 말라죽어버리지 않을까.

-목숨 부지를 위해 사비까지 털어 팔자에도 없는 미친개 비위를 맞추고 마계의 틈 나들이나 해야 하다니 빌어먹을...!

명령을 받들어 점점 멀어져가는 전령의 등을 보며 성황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빚은 반드시 몇 배로 받아내고 말 테다.

 

 

 

 

“안녕하십니까.”

 

성국 식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인 것도 잠시, 예의 무표정으로 얼굴을 덮은 기사는 성황이 기다리고 있던 알현실을 가로질러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는 대략 40세 이상. 어쩌면 그보다 조금 젊을지도 모르겠다.

걸치고 있는 것은 갑옷과 망토의 조합으로 어우러진 단독무장 형태의 장비. 직접 전면에 서서 경계근무를 서는 중이라 잠깐 기다려야 한다는 종기사의 증언에 신빙성이 실리는 차림이었다.

평균을 훌쩍 넘는 장신에 완벽한 근육질의 체격이라는, 딱 봐도 기사스러운 인물.

유난히 성법이 약해 오랫동안 하급 성기사에 머물러 있었고, 떨어지는 성법 능력으로 인한 불이익을 메꾸기 위해 다른 성기사들의 수십 배를 노력해 마침내 성법 없이 칠성기사들을 압도하는 경지에 올랐으며, 성국의 쟁쟁한 실력자들을 오로지 검술 실력만으로 누르고 성기사 최고의 지위와 함께 성국의 군권을 거머쥔 자, 명실상부한 성국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자 - 빛의 검 크로덴이었다.

머리에 군데군데 잿빛 눈이 사알짝 내려앉기 시작하고 강직한 얼굴에는 서서히 작은 강줄기들이 물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세월의 흔적도 자신이 맡은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려는 기사의 마음을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가 뿜어내는 의지의 기가 그마저도 피하지 못 한 세월의 흔적을 저 멀리 날려버린다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불혹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그에게서는 범접할 수 있는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기에 눌린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시선만을 들어 그의 낯을 주시했다.

그가 도착할 때까지 성황의 말상대와 경호를 겸해 곁에 붙어 있던 종기사의 표정만 눈에 띌 정도로 화색이 돌아왔을 뿐, 한 발 먼저 알현실을 점거한 불청객 무리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은 가실 줄을 몰랐다.

 

“오랜만이군, 크로덴 경.”

 

불청객의 우두머리 - 성황은 말없이 한 손만을 들어 종기사를 내보낸 크로덴이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을 쏟아낸 지 수 초 만에 항복해버렸다.

짧디 짧은 기싸움에서 일찌감치 밀려나고 만 성황으로선 그를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에 펼쳤던 모의실험 중 그 어느 것도 펼쳐보지 못한 채 경직된 미소를 띠우며 누구에게 던져도 상관없을 무난한 인사말을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무리 사전 언질이 없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성황인데 친히 마계의 틈을 방문해 주었는데도 맨발로 뛰어나와 반기기는커녕 수십 분을 기다리게 한 것이라든가, 종기사가 마실 것이라고 내온 것이 술은커녕 얼음조차 띄우지 않은 - 그마저도 푹푹 찌는 고온의 날씨에 찬 기운이 전부 날아가 버린 물인 거라든가, 하다못해 부하들이라도 그러모아 열렬히 환영해 주지는 못할망정 인사 한 마디 던지고선 멋대로 자리에 앉아 예의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거라든가... 불평 거리는 한 가득 있었으나 지금 이 분위기로 봐선 하나라도 입에 담았다간 본전도 못 찾고 데려온 시종 앞에서 개망신이나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등을 타고 흐른다.

만약 지금 성황이 보다 여유를 가진 시기였다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문책했겠지만(애초에 여유가 있었으면 최전방에 직접 방문하지도 않았을 거란 불평은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두도록 하자), 현재 성황은 벼랑으로 몰리는 상황이었고 자신을 벼랑으로 몬 놈에게 한 방 갈기기 위해 성국 모두가 꺼려하는 미친개의 손을 잡으려는 마음 하나로 그 로하조차도 가본 적 없는 마계의 틈에 직접 걸음한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미친개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모처럼 떠올렸던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아쉬움을 삼키면서도, 성황은 가까스로 얼굴에 드리웠던 먹구름을 걷어낸 뒤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와서 자넬 불러냈는지 궁금하겠지? 혹 자네가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것이네만... 그저 자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함일 뿐이라네. 마계의 틈에서 기어 나온 마족들을 바로 제압한 건 말일세. 정말 잘해 주었어. 핫핫핫!”

 

성국이 자네 때문에 유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며 성황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크로덴을 칭찬하면서 속으로 하필 이 때 국경을 침입한 마족들에게 죽어라 저주를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란도 없을 이 시기에 갑자기 마족들이 시비를 터는 바람에 크로덴을 빼낼 수 없어 자기 발로 직접 이 재앙스러운 곳에 와야 했던 걸 생각하면 저주가 아니라 통째로 갈아 마셔도 시원찮았지만.

만약 누구 하나라도 반란을 일으켜 줬다면, 혹은 마족이 하필 이 때 선빵을 날리지 않았다면... 성황은 성민들의 안전을 빌미로 아주 자연스럽게 크로덴을 수도로 불러들일 수 있었을 터.

아니, 그렇게 따지자면 크로덴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상황을 야기한 로하를 원망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황공합니다만, 소장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성황께서 직접 하례하실 일이 아닙니다.”

 

크로덴은 목석같은 안색과 분위기를 유지하며 짧은 대답을 던졌다. 보통 이런 대답을 하면 겸손하다느니 배포가 남다르다느니 하는 칭찬이 돌아오며 당사자끼리 주거니 받거니 덕담을 나누겠지만... 과연 미친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성황은 시험 삼아 하나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아니, 대단한 일이 맞으니 겸손해할 것 없네. 성국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었으니 당연히 그에 걸맞는 보답이 있어야지.”

 

말을 마친 성황은 별안간 양손을 끼고 팔꿈치를 탁자에 세운 뒤 한 단계 목소리를 낮췄다.

 

“보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 전에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도착했나?”

 

“선물 말입니까?”

 

성황에게서 그대로 말을 받은 크로덴의 억양에 미묘한 떨림이 섞였다.

그 떨림이 특정 단어에서 방출되는 민감한 기류임을 깨달은 성황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손을 붕붕 휘저었다.

 

“물론 자네가 수뢰 따윈 하지 않는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뿐만이 아니라 성기사단 모두에게도 같은 걸 보내놨지. 그래야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일세.”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다네. 혹시 아직 안 열었다면 이제라도 풀어보는 게 어떻겠나?”

 

성황은 미지근하다 못해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한 컵을 기울여 목을 축이며 완곡하게 속마음을 비췄다. 어서 이 젠장맞게 미지근한 물은 치워버리고 하사품을 열어 자신의 타는 목을 채워달라고.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거 감사반에 넘겼거든요.”

 

음푸.

무지막지 진심이 담긴 크로덴의 차분한 회답에 성황은 무심코 입에 든 것을 내뿜고 말았다.

 

“성황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대로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는 그를 염려해 다가서는 부하를 밀쳐낸 성황은 어이가 탈출한 표정으로 멍하게 되물었다.

 

“가... 감사반에 넘겨? 마튼 산 최고급 와인 세트를...?”

 

“열어보지 않아서 뭐가 들었는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통째로 보낸 건 맞습니다.”

 

“이 미친...!”

 

성황은 ‘그게 뭐 문제라도?’라는 형색으로 그를 응시하는 크로덴을 향해 뭐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다 있느냐고 소리치려던 욕구를 겨우 참았다.

미친개가 여지껏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단 소문은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꽉 막힌 벽창호 같은 놈이었을 줄은... 아니 잠깐.

성황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이번에 성황이 보낸 선물은 기사단들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작은 하사품이지 결코 뇌물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서기관을 불러다 그럴싸한 문구와 자신의 이름을 포장지에 같이 끼워 넣었을 터였다. 허나 모종의 이유로 그것이 누락되었다면 사정을 모르는 크로덴으로서는 당연히 감사반에 보낼 수밖에 없을 거...

 

“아닙니다, 폐하. 선물에는 전부 빠짐없이 성황 폐하의 격려를 써서 제대로 송달했습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성황의 눈에서 이상을 감지한 부하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맞습니다. 성황 폐하의 존함과 그 격려인지 독려인지 모를 양피지도 같이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반에 보낸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발신인 없이 좀 더 비밀스럽게 왔다면 감사반이 아니라 그냥 갖다 버렸을 거라는 뜻입니다.”

 

“허어...”

 

시원스레 단언하는 크로덴에게 성황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체스말 쯤으로 여기는 로하 놈을 혼쭐내기 위해 이 미친개와 손을 잡으려 한 건데, 로하를 갈겨주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미친개에게 끌려가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이거 참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먼, 크로덴 경.”

 

어쩐지 열이 받는다.

 

“성황의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남의 마음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겐가!”

 

소소한 불만이 쌓인 데 더해, 혹시 크로덴이 뇌물이라고 안 받을까봐 지 할 일은 쥐뿔도 못 하는 다른 기사단들까지 챙긴답시고 사비를 턴 것에 대한 불만이 겹친 성황은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뭐가 마음에 안 드냐니... 전부다, 전부! 이 지옥 같은 곳을 방문한 성황을 기다리게 하질 않나, 기껏 신경 써서 챙겨줬더니 남 좋은 일이나 시켜주질 않나, 고위 인사가 방문했는데도 접대가 형편없질 않나!”

 

크로덴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는 성황을 차가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 메마른 눈빛에 서린 것은 경멸도, 반성도, 초조함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곳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근자에 마족 몇 마리가 국경을 침입한 사실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소장이 쉽게 쳐부수긴 했지만... 2차, 3차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당분간 소장이 직접 전면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성황 폐하께서도 당연히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지원 목적도 아닌, 더구나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한 고위 인사의 방문을 국가의 안전보다 더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려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크로덴은 예의 무표정을 간직한 채 씩씩거리는 성황이 잠시 입을 다문 틈을 타, 그의 얼토당토않은 불평에 하나하나 반박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소장이 최전방을 지키는 임무를 일임 받은 지 근 10년이 흘렀으나, 이 곳을 방문하는 고위 인사는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소장이 하급 성기사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성황 폐하께서 이렇게 찾아 주신 사례 역시 전무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소위 돈 있고 빽 있는 기사들은 아무도 이 곳에 지원하지 않고 찾지도 않는데, 하물며 성황께서 지금 갑자기 찾아주실 거라고 예상하긴 어려운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설사 알았다 해도 열과 성을 다해 접대할 생각 따윈 전혀 없지만.

뒷말은 마음속에만 간직하고서, 크로덴은 말을 잃고 우물거리는 성황을 응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또한 군법 상 근무 중인 기사는 부칙 4조에서부터 12조까지의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술을 입에 대선 안 됩니다. 현재 이 곳 창고에는 그 예외적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포도주가 조금 있을 뿐으로, 겸사겸사 방문한 고위 인사에게 낼 여분은 전혀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그 상대가 설사 성황 폐하라 해도 말입니다.”

 

“아니 그게...”

 

“그리고 그 신경 써서 챙겨주셨다는 부분 말인데, 언제 소장이 폐하께 단 한 번이라도 신경 좀 써달라고 읍소한 적이 있었습니까? 게다가 성황께선 기사단 전체에 뭔가를 보내면 그건 뇌물이 아닐 거라 착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뇌물죄의 보호법익은 직무행위의 불가매수성과 직무집행의 공정성에 기인하는 바, 뇌물죄의 성부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직무의 대가로서 부당한 보수나 이익을 취했느냐의 여부로 판단해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즉, 기사로서 당연히 맡은 일을 한 것에 대해 법률로 명시한 봉록이나 상여금 이외의 재물 혹은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명백히 수뢰죄에 해당하는 바, 이는 처벌받아 마땅한 중죄입니다. 소장은 언제 어디서나 법률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철저하게 업무에 임하고 싶은 마음에 성황께서 보낸 재화를 감사반에 보낸 것이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

 

이번에야말로 성황은 말을 잃고 침묵하였다.

크로덴이 본디 고분고분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유명했다. 다른 이들은 설렁설렁... 다시, 부드럽게 넘어가 줄 일조차 깐깐하게 물고 늘어질 거라는 것도 전망해서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득한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큭...”

 

성황은 작은 신음을 토해내며 맞은편에 앉은 신의 검을 가만히 주시했다.

말발로는 이 녀석을 당해낼 수 없다.

성황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생각보다 초라하게, 그럴 듯한 응수 한 번 못 해보고 수긍해야 하는 현실은 맘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태클을 걸었다간 이 무자비한 기사는 특유의 능란한 화술을 이용해 더욱더 상대를 궁지로 몰 테지. 그 상대가 성황이라 해도 말이다.

 

“뭐, 크로덴 경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성황은 기세를 한 층 누그러뜨렸다. 여기서 대립각을 세워봤자 본전도 못 찾을 뿐이라면, 상대가 한 수 접어줄 때 못 이기는 척 수긍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지 않을까.

게다가 애초에 성황의 목적은 크로덴이 선물을 받았냐 버렸냐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머리에 화살 맞은 게 아닌 이상, 고작 그딴 걸 알아보겠다고 성법이 없으면 잠시도 못 버틸 이 생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미친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후우.

성황은 짧은 한숨과 함께 컵을 들어 남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갈증 해소에는 그닥 도움이 안 되지만, 적어도 타는 목은 조금이나마 달랠 수는 있으니.

 

“농담은 이 정도로 하고... 바쁘니까 바로 용건을 말하지.”

 

주도권 한 번 잡아보려다가 한창 나이 차 나는 기사에게 망신만 당했다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고, 성황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곧 은퇴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헌데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내 뒤를 이을 마땅한 적임자가 없거든. 다 성에 안 차는 놈들뿐이라서 말이야... 뭐, 찾아보면 그 중에서 쓸 만한 놈이 나올지도 모르네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인재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그래서, 음...”

 

이 부분에서 성황은 잠시 뜸을 들였다.

뒤통수를 친 로하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욕망과, 단 한 번도 관용을 베푼 적도 임무에 실패한 적도 법을 어겨본 적도 맡은 사명을 대충 처리한 적도 없었던 저 빈틈없는 강철 같은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최선일지를 염려하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갈등을 빚었던 탓이었으나....

 

“유능하고 명석한 자네를 믿고 좀 더 앞으로 이끌어주고 싶다네.”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지르지 못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렇습니까.”

 

돌아가는 건지 돌직구를 날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성황의 화법을 이해하기 위해 크로덴이 상념에 잠긴 것은 아주 잠시.

 

“즉, 제일 그럴 듯한 성황 후보를 선점해 폐하의 뒤통수를 날린 로하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 싶으니까, 뒷일이야 어찌 되든 유일하게 로하에게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한 카드로 소장을 낙점하셨다는 거군요.”

 

“아니, 대체 어떻게...?!”

 

성황은 놀라움에 찬 대사를 토했다.

 

“그냥 딱 보니까 감이 왔습니다.”

 

동요의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성황에게 크로덴은 무심히 대꾸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성황은 방금 전과 완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처음의 ‘어떻게’는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정을 꿰뚫어보았느냐’의 의미이고, 지금의 ‘어떻게’는 ‘딱 보니까 감이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의미겠지만.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크로덴의 방식이 아니지만, 눈앞의 사내는 성국을 다스리는 성황으로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었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무의미한 평행선을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알아먹냐, 귀찮아 죽겠다는 내심을 무감정의 가면으로 완전히 덮어씌운 크로덴은 하나하나 그 이유를 석명해나갔다.

 

“첫째, 은퇴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걸로 보아 성황께서 머잖아 새 성황을 뽑는 선거를 여시리란 사실을 짐작했죠. 둘째, 마땅한 적임자를 못 찾았다고 한 걸로 봐선 로하와 성황께서 사이가 틀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처럼 그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면 성황께서 적임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친히 소장을 찾아오셨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셋째, 저를 밀어주고 싶다고 하실 때 잠시 머뭇거린 걸로 봐선 성황 폐하 역시 저를 끌어들이는 걸 탐탁찮아 하시는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자고 말한 걸로 봐선 로하가 정말 대놓고 폐하의 뒤통수를 쳤음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추리죠.”

 

“아니,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어떻게 알아챌 수 있느냐고 말하려던 성황은 뒷말을 삼켰다. 지금 성황의 앞에서, 크로덴이 대사제 로하의 경칭을 생략하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통수를 친 이상 선거를 여는 것도 온전히 폐하의 뜻은 아니겠군요. 밀월관계가 지속되었다면 폐하께서 선거를 여신다 해도 사제들이 반대해야 정상이니까... 이미 성황 폐하 스스로 로하와 척을 졌다고 말씀하신 거나 마찬가지니 별 반대 없이 선거가 열리긴 하겠군요. 즉, 성황께서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시는 동안 로하는 물밑작업을 마쳤고, 이제 됐다 싶으니 폐하의 뒤통수를 문 거죠. 로하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폐하께선 뚜껑이 열린 나머지 뒷감당이야 어찌 되든 소장의 손을 빌려 로하를 손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거고.”

 

수도의 소문에 어두운 최전방에 근무하면서도 말 몇 마디에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한 그의 귀신같은 능력에 놀란 성황이 입을 벌리고 있든 말든 크로덴은 계속 설명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은 있었다.

왜 로하는 갑자기 이 시기에 성황을 등졌을까?

이 역시 냉정하게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바로 (로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의 성황보다 더욱 성황 자리에 걸맞는 자가 나타난 것. 그 자는 아마 마왕을 퇴치한 공로로 단숨에 지명도가 하늘로 치솟은 그 녀석이겠지.

어쨌든 그는 현재 눈앞에 엉덩이를 걸친 성황보다 훨씬 -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성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 터이고, 로하 입장에선 현 성황보다 더욱 다루기 쉬운 호구... 다시, 디오렌을 다스릴 적임자가 나온 거나 마찬가지니 더 이상 현 성황에게 고개를 조아릴 까닭이 사라진 셈이다.

또 로하는 머리도 잘 돌아가니 성황을 내치기에 앞서 먼저 그 자와 접촉해 온갖 감언이설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이 가진 추천권으로 내세울 새로운 성황 후보로 선점해 놓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만.

크로덴은 이를 성황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지만, 굳이 성황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먼저 주절주절 늘어놓아 정보를 떠먹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자네 설마 사람 풀어서 내 뒤를 캐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크로덴이 말을 멈춘 틈을 타, 성황은 의심스럽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제가 정치에 뜻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황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겐가?”

 

“딱 보니까 감이 잡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과연.

성황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크로덴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조금 정보를 흘렸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전후사정을 완벽히 파악해 버리다니.

지금껏 단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한 적 없다는 경력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무력뿐만이 아니라, 그의 걸출한 지성이 자리잡고 있어서인지도.

허나... 아무리 남다른 지혜를 갖고 있다 한들 과연 이것도 알 수 있을까?

 

“그래... 자네 머리가 좋다는 건 내 인정함세. 헌데 로하 놈이 점찍었다는 새 성황 후보가 누구인진 암만 자네라도 알 수 없을 거...”

 

“매의 눈 기사단장 뭉클리아.”

 

푸웃.

너무나도 쉽게 단언하는 크로덴의 대답에 성황은 무심코 숨을 뿜어냈다.

 

“로하가 자신만만하게 성황 폐하를 등졌다는 건 자신이 선점한 카드가 그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면 그 인물이 성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든가. 현재 그만한 지지를 받는 인간은 뭉클리아 뿐이지 않습니까. 이 곳에도 그가 마왕을 퇴치했단 소문이 들려올 정도이니 실제 그의 인기는 어마어마하겠죠. 워낙 착해빠진데다 아무 생각 없는 놈이기도 하니 로하의 기준에도 딱 들어맞았을 테고. 로하가 머리에 화살 맞지 않은 이상 이 완벽한 호ㄱ... 인재를 내버려 둘 리가 있겠습니까?”

 

크로덴이 말했다.

 

“아...”

 

오싹.

한순간 성황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푹푹 찌는, 40도를 훌쩍 넘어서는 이 더위 속에서 소름이 돋다니.

아마도, 피도 눈물도 없다며 모두가 두려워하는 저 미친개의 능력에 성황이 탄복하고 말았기 때문이리라.

-어휴...

성황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생각 이상으로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이라곤 해도 만약 크로덴이 성황이 된다면 보다 성국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버렸으니 말이다.

성국을 잘 이끌어 나가건 말건 그건 이미 현 성황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로하의 뒤통수를 갈길 수 있느냐의 여부, 단지 그것 뿐.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더 말하지 않겠네. 그러고 보니 아까 제안에 대한 대답을 아직 못 들었는데, 나와 손을 잡는다고 봐도 되겠는가?”

 

아주 잠시, 크로덴은 곧 벼랑으로 몰릴 초로의 사내를 주시했다.

크로덴 자신을 성황 후보로 올려줄 테니 성황이 되어 로하를 조지고 겸사겸사 자기 뒤를 봐달라고 말하는 저 속내는 진작 파악했다.

다만...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손을 잡을 거라 확신하는 말투로 봐선 설사 크로덴이 성황의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라.

만약 크로덴이 이를 거절한다면 성황은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직접 최전방에 헛걸음을 하게 만든 데 대한 분풀이를 하려 틀 테지.

-알 게 뭐야.

크로덴은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성황이 되도 않는 분풀이를 하는 건 아무래도 좋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뭐 새삼스럽게.

빛의 검 자리를 차지한 후 크로덴이 가장 많이 한 일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싼 똥을 치우는 일이었다. 본래 맡은 임무인 마계의 틈 방어와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오는 반란 제압 지령은 덤이었고, 예상했든 예상 못 했든 발생하는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 역시 그의 차지였으며, 터진 문제를 겨우 수습해 놓으면 사제들은 온갖 개똥철학과 되도 않는 불만을 늘어놓으며 그를 지탄하고 손가락질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징계를 내렸다.

이 생활을 10년 가까이 해왔는데 이제 와서 성황의 하잘것없는 생트집에 기인한 앙갚음을 받는다 한들 뭐 어떠랴. 끽해야 빛의 검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성국에서 추방되는 정도일 터.

크로덴이 염려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근자에 발생한 몇몇 마족이 마계의 틈을 넘어 국경을 침입한 사건.

크로덴이 직접 전면에 서서 경계근무를 서 본 결과,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마족들이 깔짝대며 간을 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모종의 이유로(예를 들면 징계위원회 참석 등의 명목으로) 크로덴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감시에 틈이 생기면 간을 보던 마족이 얼씨구나 하고 다시 국경을 침입할 것이고, 지휘관 부재라는 악조건에 놓인 그의 부하들은 영락없이 필요 이상의 손실을 입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성국 전체에 해악을 끼칠 우려가 높은데다, 여태껏 크로덴이 쌓아올렸던 - 가장 적은 손해로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다는 명성에도 먹칠을 하게 될 것이 틀림없았다.

그의 주어진 일은 결함 없이 완전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과 절대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 특성 상 쓸데없이 성황의 화를 돋워 상황을 악화시키는 수를 선택하는 것은 논외.

마음에 안 든다며 크로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억지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똥을 싸려 하다니, 아무래도 술과 고기를 너무 흡입한 나머지 뱃살뿐만이 아니라 뇌마저도 지방이 가득 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느 정도는 성황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한 번 시험해볼까.

 

“법률상 문제는 없으니 성황 폐하께서 꼭 그리 하셔야겠다면 소장은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하나 충고 드리자면 그만두시는 게 나을 겁니다.”

 

“왜지?”

 

“소장의 능력으로는 성황께서 원하는 결과를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겸손을.”

 

진심을 담아 충고했건만, 성황은 이를 코끝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외지로 보낸 것도 모자라 제대로 대우도 안 해줬으니 섭섭해할 만도 하지. 내 자네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래서 지금이라도 자네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려는 게 아닌가. 자네 실력이라면 로하 놈을 누르는 것도 꿈이 아닐세. 아무튼 자네 입으로 상관없다고 했으니 나와 손잡는 걸로 알고, 난 이만 가봄세.”

 

끝끝내 크로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성황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치에는 전혀 끼어들지 않는다는 그 크로덴이 자신과 손을 잡겠다고 말해왔다. 솔직히 이렇게 한 방에 수락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 딴에는 정치에 관심 없는 척 했지만 세상에 권력에 흥미 없는 놈이 어딨겠어. 역시 미친개도 나와 같은 부류였던 게야...

그간 숨겨왔던 미친개의 일면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며, 성황은 한시바삐 돌아갈 채비를 했다.

혹여나 크로덴이 마음을 바꿔 약속을 백지로 되돌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물론, 생기를 쭉쭉 빨아들이는 마기가 풀풀 날리는 이 생지옥 같은 틈새에서 한시라도 빨리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존 본능이 더욱 크게 작용했지만.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크로덴 역시 성황을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성황이 어서 빨리 이 곳에서 꺼져주길 바랬다. 규정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임시 호위단을 꾸려서라도 등을 떠밀고 싶을 정도로.

 

“설마 마중도 안 하려는 겐가?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울컥.

이 인간은 정녕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그저 빛의 검이 굽실대는 꼴을 보고 싶은 걸까.

크로덴은 자신을 향해 비난하는 어조로 말문을 턴 성황을 향해 예의 딱딱한 투로 대꾸했다.

 

“성황 선거는 오로지 현 성황만이 열 수 있으니 그 때까지 로하가 폐하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테니 안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선거를 열고 후보를 등록하기까지의 사이가 걱정되는 거라면 기사단에 맡기시고요. 로하라면 이미 손을 써뒀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믿을 만한 기사가 없는 거라면 중립을 지킨다는 타오라 활활에게 가십시오. 정치는 몰라도, 성황을 보호하는 것 역시 성기사의 기본 의무이니 거절은 못 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자네가 먼저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하지 않나?”

 

성황이 되묻자 크로덴은 아주 살짝, 비소라 해도 좋을 내색을 비쳤다.

 

“언제 다시 마족이 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소장은 지금 당장 경계 근무에 복귀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현재 근무 혹은 대기 중인 병력 역시 차출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성황 폐하께서 무사히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대책이기도 하니 부디 양허해 주시죠.”

 

“...흥.”

 

아까 크로덴에게 말발로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게 떠올랐는지, 성황은 눈살을 찌푸리고 콧소리를 냈다.

일단 후보로 등록할 때까지만 참도록 하자. 징글맞도록 재수 없는 놈이지만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지금은 너그러이 넘기자며, 성황은 인사도 없이 시종을 끌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띠리링.

 

“치워.”

 

성황이 나간 지 수 초 후, 종을 울려 대기 중인 종기사를 부른 크로덴은 불청객이 머물다 간 자리를 가리키며 간단명료한 지시를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빠릿한 대답과 함께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부하를 뒤로 한 크로덴은 근무에 복귀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머잖아 열리게 될 성황 선거, 실각된 성황, 새로운 태양의 후보로 오르게 될 뭉클리아.

아무래도 곧 디오렌에 도 한바탕 파란이 닥칠 것 같았다. 지금 이상으로 더더욱 혹독하고 모진 파란이.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크로덴은 한 마디를 낮게 뇌까린 뒤, 머릿속에서 근자에 열리게 될 성국 선거전에 대한 정보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정치는 자신의 분야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성황이 추천하는 후보로 낙점되긴 했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취해 온 태도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현재 크로덴이 해야 할 일은 마족에 대한 경계와 단속. 다른 데 한 눈 팔 여유는 없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멀찍이 떨어져서 간을 보는 마족들을 끌어내 소탕할지, 혹은 제 풀에 지쳐 물러나게 해야 할지 따위를 사고하며, 크로덴은 문을 열고 다시 이글대는 열기와 정기를 빨아먹는 마기가 흥건한 전지를 향해 나아갔다.

저멀리 하늘 끝자락에 서서히 어스름이 깔리는 걸로 봐선 머잖아 해가 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