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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ODEN/미친개(fanfic)

조소하는 자의 자리 (3)

by 부야카샤 2019. 10. 2.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 아! 아!"

 

태양신의 상징이 서린 단상에 오른 사회자가 마이크를 조절하여 작동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내 아무 문제없음을 확인한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어 목청껏 외쳤다.

 

"다시 선택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새로운 성황을 선출할 때가 온 것입니다! 성국의 새로운 지도자! 영광스러운 태양의 후보자들을 이 자리에 모셨으니 모두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고위 성기사와 사제, 그리고 성황의 추천을 받은 후보의 이름이 적힌 양피지를 받기 위해 사회자의 연설이 잠시 기세를 멈추자, 그 틈을 비집고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흐르고 있었다. 로하의 생각대로.

 

"낙승이로구만."

 

2층에서 연설을 듣던 로하는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치켜올렸다.

이제 곧 3명의 성황 후보자가 발표될 것이다. 로하에게 협력을 약속했던 모 기사단장의 정보에 따르면 고위 성기사들이 추천한 후보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제 출신이라 했고, 성황이 추천한 후보는 누군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래봤자 자신이 추천한 후보 발끝에는 미치지 못 할 것이다.

로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성황 후보들을 소개하는 연설을 듣고, 이대로 성황 선거일까지 기다렸다가 축제를 연 성민들을 격려차 방문해준 뒤 최초의 언덕 위에 있는 수도원에 가서 후보자들의 최후의 토론 같은 아무래도 좋은 행사는 냅두고 마지막 로비에 참가했다가 목욕재계를 하고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으면 될 뿐이었다.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게 로하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뭐 어쩌랴. 중앙 대사제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밀려오는 하품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고 있는 힘껏 입을 벌린 로하는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무대에 눈길을 집중했다. 그 별 볼일 없다던 1번 후보와 누군지 알 수 없다던 3번 후보 낯짝이나 어디 한 번 구경 좀 해볼까.

 

 

    

 

시간을 수십 분 되돌려서.

대기실 구석에 자리를 잡은 불혹을 훌쩍 넘긴 남자의 눈동자에는 불안의 기색이 역력했다.

기름을 발라 꼿꼿이 세운 갈색 머리는 긴장 때문에 살짝 기가 죽어 있었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검은 양복도, 자신감의 상징이라는 붉은 넥타이도 주인을 초조함으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했다.

서서 돌아다니자니 체통을 의심받을 것 같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판이었으며, 텅 비어 있는 대기실을 훑어볼 때마다 그의 불안감은 계단을 오르듯 천천히 수직상승한다.

어서 2번, 3번 후보자들이 도착하여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품평하는 시간을 가져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며 갈망하고 있을 무렵.

덜컹.

별안간 문이 열리고 바깥세상의 공기가 훅 하고 들어왔다. 사람의 존재감과 함께.

 

"어이쿠, 안녕하십니까. 제가 제일 먼저 온 줄 알았는데... 먼저 와 계신 분이 있었군요."

 

문을 열고 2번째로 대기실에 도착한 후보자가 붙임성 좋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남자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지금 막 도착한 후보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원하게 벗겨진 대머리와 그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붉은 관(冠), 뒤통수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 삐죽 머리. 그리고 인중을 덮은 두터운 콧수염과 옹이눈, 붉은 관과 세트로 맞춘 사제복.

자기소개 따위 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자가 바로 마왕을 무찌른 공로로 성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새로운 태양의 후보, 고위 사제들(이라기보단 로하 중앙대사제)의 추천으로 성황 후보의 자리를 거머쥔 인물 - 칠성기사단 중 하나인 매의 눈 기사단장인 뭉클리아가 틀림없었다.

인제 겨우 서른아홉밖에 먹지 않았음에도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것은 마왕의 소멸탄을 막는 대가로 머리카락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마왕과 싸운 후유증인 것일까.

 

"아, 예. 뭐 어쩌다보니 제일 일찍 오게 됐습니다. 저는 기호 1번으로 출마한 뽀오옹이라고 합니다. 뭉클리아 님이시죠?"

 

기호에 걸맞게(?) 제일 먼저 대기실에 도착해 초조함과 긴장으로 떨던 뽀오옹은 먼저 말을 붙여 준 뭉클리아에게 내심 감사하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야, 성기사단장님들의 추천을 받은 분이 대체 누굴까 궁금했는데... 오늘 처음 뵙는 거긴 합니다만 역시 기사단장들의 추천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오라가 팍팍 풍기네요. 같은 목적을 둔 사람들끼리 한 번 잘해봅시다!"

 

"아 예. 저야말로."

 

뽀오옹의 시선은 정정당당하게 한 번 붙어보자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뭉클리아의 얼굴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착하다. 순박하다.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

단 몇 초 만에 뽀오옹의 뇌를 파고든 뭉클리아의 첫인상은 예상보다 양호했다. 이 모든 것이 연기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나름 사회생활을 하며 다져진 뽀오옹의 내공은 뭉클리아의 언행이 연기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만약 그의 판단이 잘못된 거라면, 대사제가 추천한 2번 후보는 엄청난 연기자라는 뜻이 되겠지.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

패배를 시인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뽀오옹으로선 뭉클리아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의문의 고위사제 단체 살인사건이 터진 이후, 무려 어린 나이에 정적들을 제거한 뒤 실권을 휘어잡고 수십 년을 뒤에서 온갖 공작으로 자신의 배를 불려온 로하 대사제가 추천한 후보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로하와 손을 잡은 건지, 아무 생각 없이 로하의 사탕발림에 넘어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뽀오옹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중앙 + 지방 사제들이라는 든든한 뒷배와 마왕을 퇴치했다는 명실상부한 정통성을 동시에 거머쥔 자를 대체 자신이 무슨 수로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뽀오옹 자신은 2등이라는 걸.

이렇게 된 이상 성황의 추천을 받은 3번째 후보와 손을 잡는 것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뭉클리아 경, 혹시 성황 폐하의 추천을 받은 후보가 누군지 아시는지요?"

 

뽀오옹은 우연을 가장하여 뭉클리아에게 정보 탐지를 시도했다. 걸려들면 럭키-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가볍게 짚어 본 것이건만, 유감스럽게도 뭉클리아는 너무 쉽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오늘 후보를 발표할 때 어차피 나타나실 테니까 따로 알아보진 않았거든요. 대사제님께서도 아무 말 없으셨고..."

 

"그렇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말끝을 흐리면서도 뽀오옹의 시선은 벽에 걸린 시계에 멈춰 있었다.

이제 곧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다. 누군지는 몰라도 시간에는 맞춰서 들어올 것이니 굳이 뭉클리아를 추궁하지 않더라도 곧 그 면상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설마 성황 선거 후보로 낙점된 성민이 지각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세 번째 후보도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것 같은데 다 모이면 의기투합이라도 한 번 하는 건 어떨까요? 아님 이것도 인연인데 끝나고 같이 술이라도 한 잔..."

 

"예~예. 그러시죠."

 

몇 번이고 시간을 확인하며,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허물없이 다가서는 뭉클리아의 쓰잘데기없는 제안에 기계적 대답으로 응수하길 수 분 뒤.

철그렁.

어쩐지 밖에서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 것 같았다.

잘못 들은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철컹거리는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이거 성기사가 단독군장하고 움직일 때 나는 소리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혹시 이 시간에 뭐 무거운 짐을 나르는 건가 하고 뽀오옹이 짱구를 굴리고 있는 옆에서 뭉클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단독군장이요?"

 

"예. 왜 성기사들이 복무 시 착용하는 복장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군대를 안 갔다 와서 대체 뭔가 했는데... 과연 뭉클리아 경은 기사단장 출신이라 다르시군요. 근데..."

 

덜컹.

왜 성기사가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굳이 군장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느냐는 당연한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이 뭉클리아가 들어오면서 닫아놓았던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고, 갑자기 들이닥친 일련의 거친 동작에 2명의 후보는 화들짝 놀랐다.

마침내 성황의 추천을 받은 마지막 후보가 들어온 거구나 싶어 시선을 옮긴 뽀오옹과 뭉클리아는 문을 닫고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인영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둥지 속의 새끼 새처럼 쩌억 입을 벌렸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다. 니가 무슨 먹이 조르는 새끼제비냐."

 

언제까지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할 것만 같았던 영겁의 시간을 깬 것은 대기실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입을 벌린 채로 멈춰 있는 뭉클리아를 향해 한심하다는 투로 핀잔을 던진 기사였다.

말도 안 돼.

뽀오옹의 등에 약간의 오한이 일었다.

최전방에서 마계의 틈이나 지키고 있을 자가 왜 여기에? 그것도 하필 지금??

완벽하게 의표를 찔린 뽀오옹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왜 여기에 미ㅊ..."

 

"선배님! 선배님이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정말 다행스럽게도 무심코 기사의 별명을 부르려던 뽀오옹보다 뭉클리아의 대사가 좀 더 빨랐다.

뭉클리아가 먼저 질문을 던짐으로 인해 비로소 뽀오옹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감히 성국 최고의 미친개 앞에서 그를 별명으로 부르려 하다니...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개념이 가출한 모양이었다.

 

"왜 왔을 것 같냐?"

 

미친... 다시, 빛의 검 크로덴은 잠시 뽀오옹에게 머물렀던 눈초리를 거두고 뭉클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무심코 뽀오옹은 뭉클리아를 향해 속으로 딴죽을 걸었다.

바깥에서 경호를 위해 대기 중인 성기사가 난입해야 할 급박한 사정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성황 후보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대기실에 성기사가 들어왔다.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잖은가.

 

"장군이 바로 성황께서 추천한 마지막 후보인 거로군요."

 

뽀오옹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 하나밖에 없는 답을 도출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단서가 주어졌는데 몰라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정말요?! 선배님, 이 분 말이 사실인가요?!"

 

...물론 모르는 바보도 있지만...

 

"그래 맞다. 보면 알 거 아냐."

 

크로덴의 음색에 살짝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권태의 기류라는 걸, 아직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선배가 왜...?!"

 

"뭐 그렇게 되었다."

 

크로덴은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대기실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팔짱을 끼었다.

질문하지 마, 말 걸지 마, 신경 끄고 니들끼리 놀라는 기운을 퍼뜨리는 크로덴의 서슬에 기가 죽으면서도, 뽀오옹은 아주 조금 그에게 접근하여 말을 붙여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성황께서 누굴 후보로 찍었네 하는 소문은 많이 들려왔지만 그게 장군일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다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뽀오옹이 조심조심 물었다.

 

"그리 궁금하다면 성황께 직접 찾아가 여쭤 보시오."

 

귀찮음이 잔뜩 묻은 크로덴의 대답에는 이 이상 접근했다간 가만있지 않겠다는 오라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더 이상 그에게 대꾸해선 안 된다는 생존 본능의 충고에 따라 얌전히 구석자리로 돌아간 뽀오옹은 생존 본능의 조언을 거스르고 다시 크로덴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보다 딱밤을 맞는 뭉클리아를 멍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꼴찌다..."

 

뽀오옹은 반쯤 포기한 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뭉클리아는 몰라도 다른 후보라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상대가 미친개가 아니었다면 말이지만.

한순간, 대체 성황께선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미친개랑 손을 잡은 거냐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뽀오옹은 고개를 들어 궁금증을 떨쳐냈다.

빛의 검이 성황 후보로서 이 곳을 찾은 마당에 이런 질문을 떠올려봤자 의미가 없다. 빛의 검이 성황 후보가 됨으로써, 이번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될 지 예측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뽀오옹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대사제라는 든든한 빽을 지닌 뭉클리아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크로덴이 내비치는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이거 참... 누구한테 붙어야 하나...

명실상부한 성국 최강의 검에게 가야 할까, 아니면 성국의 실세인 로하 대사제의 측근에게 붙어야 할까.

뽀오옹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수 백 쌍의 눈초리가 향한 곳은 단상 위에 서서 성황 선거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사회자의 손 - 정확히는 도우미로부터 건네받은 작은 양피지 세 조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 막 자랑스러운 태양의 후보자 세 분의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소개하겠으니 모두 따뜻한 환영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짝.

사회자의 추임새에 충직하게 반응하는 구경꾼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다시 한 번 장내를 뒤흔들었다.

 

"첫 번째 태양의 후보! 기호 1번 뽀오옹 경을 소개합니다!"

 

사회자의 호명이 떨어지고 수 초 뒤.

왼쪽 입구에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불혹을 훌쩍 넘긴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별 거 아니구만.

시선이 머무른 지 단 4초 만에 로하는 1번 후보의 그릇을 파악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재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은 것 같다만, 유감스럽게도 성황을 뽑는 이 자리에 서기에 그의 연륜은 턱없이 모자라다.

게다가 저 불안한 걸음걸이하며, 새하얗게 질려 경직된 미소를 짓는 얼굴 좀 보라지.

최후의 토론 시간도 아니고 오늘은 그저 후보로서 자신을 소개하는 짧은 인사와 연설, 그리고 선거 광고용 도화 제작만이 예정되어 있을 뿐인데 멀리서 지켜보는 로하조차 단박에 알아볼 만큼 노골적으로 침착성을 잃은 모습이라니.

멀리서 보이는 모습이 저 정도라면 단상에서 물러난 사회자나 앞좌석에 자리를 차지한 음유시인들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칠까.

로하 스스로 적당한 인물로 아무나 추천하라고 성기사들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을 후보로 올릴 줄이야.

십 수 년간 로하가 다져놓은 기반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인지, 대륙 최고로 게으르다는 성기사들의 특징이 이번에도 가감 없이 발휘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물론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릴 수 있었던 데에는 성국의 군권을 거머쥔 미친개가 정치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으며, 그 다음으로 가능성이 있었던 - 나름 인품도 실력도 뒷배도 갖추고 있으나 최강의 검 시합에서 미친개에게 완패한 타오라 활활마저 정치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하는 모든 권력을 중앙으로 끌어 모아 대동단결해야 한다며 뜻 모를 연설을 펼치는 1번 후보를 안쓰러운 눈길로 응시했다.

미리 준비했을 터인 웅변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 하는 무능한 후보에게 연민을 가진 것도 잠시, 로하의 마음속에 작은 의혹의 불길이 일었다.

침착성을 잃은 저 태도는 정녕 긴장으로 정줄을 놓은 게 맞는 걸까 하는 의혹이.

흔들리는 모양새며 하얗게 질린 저 얼굴은 긴장이 아니라 되레 악마나 귀신을 보고 정신줄을 놓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거 같은...

 

"두 번째 후보를 발표하겠습니다! 기호 2번! 세날의 공주 일행과 협력해 마왕을 퇴치하는데 공헌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 홀로 살신성인의 길을 걷는 마지막 성기사, 매의 눈 기사단장 뭉클리아 경입니다!"

 

로하의 마음 한 구석에 내려앉은 의혹을 몰아내려는 듯, 말까지 더듬어가며 겨우겨우 자기소개를 마치고 쓸쓸히 단상에서 물러난 뽀오옹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번째 양피지 조각을 펼친 사회자가 목청껏 2번 후보를 부르짖었다.

뭉클리아! 뭉클리아! 뭉클리아! 뭉클리아!

뽀오옹이 단상에 오른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단숨에 장내를 뒤덮었다.

 

"뭉클리아 님 덕분에 저희가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뭉클리아 님! 제발 이 쪽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내가 곧 출산하는데 아이 이름을 지어주세요!"

 

"뭉클리아 님!"

 

"뭉클리아 님!"

 

활짝 핀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흔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한 걸음 한 걸음 단상으로 올라가는 뭉클리아를 시선에 담은 사람들의 격한 반응이 현재 뭉클리아에 대한 지지도라 단언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립을 지켜야 할 사회자나 음유시인이 직접 뭉클리아의 용안을 봤다는 사실에 감격해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아주 잠깐 뽀오옹의 행색에 의문을 품었던 로하의 의심암귀조차 거둬갈 정도로 마왕을 퇴치한 성기사단장의 존재감은 비대했고, 그 당당한 태도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자신감은 뭉클리아를 한 층 더 위풍당당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여러분! 저 뭉클리아는 사욕을 채우려고 출마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국을 개혁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금도 굶어 죽어가는 성민들이 얼마입니까? 이 이상 성민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다시 한 번 성국을 인간을 위해 성법을 내려주신 태양신의 가르침을 받드는 나라로 바꿔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성스러운 나라 디오렌을 위해 이 한 몸 불태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제가 성국을 개혁할 수 있도록 조금만 힘을 빌려주십시오!"

 

준비한 양피지를 그대로 읽어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클리아의 연설은 사람들 가슴 속에 깊이 스며들어 관중들의 자발적인 찬동을 이끌어냈다. 뭉클리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박수치고 환호하는 소리가 그 증거.

그리고 멀찌감치 서서 연설을 듣는 동반자 - 로하의 얼굴에도 똑같이 환희가 서려 있다. 뭉클리아를 대신하여 직접 써 준 연설문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로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저 멍청한 놈을 선점한 게 정답이었어.

성국만의 독특한 선거 체계 상 사제들의 표만 있어도 중앙 대사제의 입맛에 당시는 성황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다.

허나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입맛 따라 성황을 선출할 수 있다면 인심 좀 써서 성민들의 지지율도 조금 고려해 줘도 좋지 않을까.

사제들의 손발이 되어 줄 충직한 허수아비가 성민들의 진심어린 지지를 받는다 - 이 이상 확고한 정통성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 사제들의 지지를 얻어 최고의 자리에 오른 현 성황조차도 지금은 성민들의 안주거리로 전락한 상태다.

로하가 죽을 때까지 권력 뒤에서 편히 단물을 빨아먹으려면 성민들에게 욕이나 먹는 늙은 사자를 갈아치우고 보다 성민들의 지지를 받는 젊은 피를 수혈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성황을 강제로 끌어내리자고... 다시, 성황의 존재와 그가 하는 짓이 로하의 앞으로의 행보를 탄탄히 다지는데 있어 다소 걸림돌이 될 거라 여겨 가장 빠르고 확실하다 싶은 수로 그 걸림돌을 치우자고 다짐한 것은 좋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단기간에 입맛에 맞는 인재를 찾아내는 것만큼 어려운 퀘스트가 어디 있을까.

물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인재를 육성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 그런 느긋한 짓을 했다가는 결실을 맺기도 전에 성황이 죽어버리거나 도중에 잡음이 생겨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으리라.

완벽한 계획을 세워 놓고도 흐르는 물에 시간만을 흘러보내던 어느 날.

앞으로도 계속 성국을 쥐락펴락 하기 위해선 가능한 한 조건을 갖춘 인재를 찾아 선점할 필요가 있다며 고심하던 로하의 앞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기적이 이루어졌다.

몸속에 마왕을 봉인한 세날의 공주를 지키러 파라도 섬에 파견 나갔다가 여차저차하여 세날 일행과 함께 마왕을 물리친 뭉클리아가 등장한 것이다.

마왕이 처음 차원을 열고 나타난 자리에 세워져 지금까지 끊임없이 마족과 대치 중인 성국에서 이 이상 완벽한 인재가 어디 있을소냐.

타이밍 맞게 인재가 등장한 것도 대박인데, 심지어 이 놈은 멍청하고 아무 생각이 없기까지 하다. 이렇게 조건이 들어맞는 인재라니 태양신이 로하에게 성은을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겼다.

연설을 마치고 고개를 숙인 뭉클리아를 향해 자신들의 충성심을 입증하려 달려드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성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양상을 확인한 로하는 내심 승리를 확신했다.

 

"해 보나 마나로군요."

 

로하의 곁을 굳건히 지키던 젊은 사제 하나가 싱겁다는 듯 운을 띄웠다.

 

"뭐 그렇지. 저기 환호하는 사람들 좀 보게나. 성국 역사상 그 어떤 후보도 저만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고."

 

"과연... 대사제님께서 무슨 연유로 먼저 뭉클리아에게 다가가 손잡을 것을 제안하신 건지 죽 궁금했는데... 뭉클리아 장군의 가능성을 미리 꿰뚫어보고서 행동하셨던 거로군요. 역시 대사제님께서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자이십니다!"

 

"하하하, 과찬일세!"

 

역시 저 같은 것은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며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달라는 칭찬을 로하는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너무 갈채를 받으면 저도 모르게 머리끝까지 날아오를 우려가 있어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로하였지만, 직접 발로 뛰어 찾아낸 완벽한 꼭두각시가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은 조금 취해 있어도 별 탈 없을 터.

...아니, 그렇지 않다.

아무리 승리가 눈앞에 있다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조금 더 인내하여 자신에게 밀려난 성황이 추천했다는 후보의 면상을 확인한 뒤 저택으로 돌아가 술과 고기를 풀어 새 성황으로 즉위할 뭉클리아를 격려하며 그 때 마음껏 취하도록 하자.

100% 승리가 확정된 마당에 이제 와서 만약의 수를 걱정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중앙 대사제로서의 위엄을 지키려는 것뿐이다.

-아, 그렇군.

로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성황이 자리한 위치를 올려다보았다. 안색이 파리하고 초조해 하는 것이 흡사 맹수에게 존재를 들킨 불쌍한 토끼 같구나.

그만큼 누리고 살았으면 이제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어떤 놈을 데려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뭉클리아를 누를 순 없을...

거라며 로하가 자신을 다잡는 동안 단상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

 

마지막으로 성황의 추천을 받은 3번 후보를 발표해야 할 사회자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마치 환상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 마냥 얼어붙어 손에 쥔 양피지 조각만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인 사회자의 기이한 행동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발표하고 끝낼 것이지, 대체 왜 꾸물거리는 걸까요? 설마 빈 종이는 아닐 테고, 뭐 못 볼 거라도 본 것 마냥..."

 

-못 볼 거...?

젊은 사제가 지나가듯 중얼거린 말 속에서 이상을 감지한 로하의 관자놀이가 실룩였다.

 

"아 거 참, 뜸 좀 그만 들이고 얼른 발표하쇼!"

 

로하가 상상의 늪에서 피어오른 의혹을 겉으로 채 드러내기도 전에 관중석에서 항의가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마지막 후보를 발표하겠습니다!"

 

관중들의 볼멘소리에 잠시 자신의 본분을 잊었던 사회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목을 가다듬어 짧은 사과를 올렸다. 이 자리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의 이름을 제일 처음 조우하여 넋을 잃었던 탓인지 아직도 조금 혼란스럽다.

사회자는 후보 소개 하나 똑바로 못 하냐며 대놓고 들으라는 듯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마이크를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실어 - 마지막 후보의 이름을 외쳤다.

 

"성황 폐하의 추천을 받은 마지막 후보! 기호 3번, 빛의 검 크로덴 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