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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ODEN/미친개(fanfic)

조소하는 자의 자리 (5)

by 부야카샤 2019. 10. 2.

분위기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딱 자기 마실 것만 주문하여 혼자 잔을 채워 넣는 크로덴이라든가, 홀로 썰렁한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후보들이 무사히 의기투합하게 된 걸 자축하는 의미로 건배하자는 뭉클리아에게 귀찮다고 거절하는 크로덴이라든가,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러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안쪽 방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뭉클리아를 보기 위해 주변을 기웃거리는 성민들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미친개라는 이명에 걸맞는 살기를 뿜어내 그들을 쫓아내면서 겸사겸사 동석한 뽀오옹까지 겁먹게 만드는 크로덴이라든가, 성국 최고의 미친개 크로덴이라든가, 성국 최강의 검 크로덴이라든가.

크로덴 경은 아까까지 귀찮은 티 팍팍 내더니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술자리에 낀 거냐, 뭉클리아 경은 빛의 검이 이런 사람인 줄 알면서도 같이 술 먹자고 엉겨 붙은 거냐, 진작 이런 분위기일 줄 알았으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불참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뽀오옹은 북받친 감정을 끌어안고 커다란 머그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천하의 빛의 검이라도 일단은 사람이니 술이 들어가면 조금은 느슨해지지 않겠냐며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따라나섰던 과거의 자신을 만나면 한 대 패주겠다는 반성과 함께.

  

"어후..."

  

내내 빛의 검과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게 생각 이상으로 중압감을 가져다준 것인지, 뽀오옹은 생각보다 일찍 취기가 올라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 아까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제대로 눈조차 마주칠 수 없었던 크로덴을 어느 새부턴가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상대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등을 타고 흐르는 오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뽀오옹은 속에서 품고 있던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반복하여 자신을 다독였다. 

선거용 도화 제작을 마친 뒤 뭉클리아를 데리러 친히 내려온 대사제를 말 몇 마디로 눌러버리는 크로덴을 보고 결심을 굳히지 않았는가.

선거 따위 아무래도 좋으니까 내팽개치고 튀자는 본능의 외침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모처럼 술이 올라 내면 깊숙이 숨어버린 용기를 싹싹 긁어모을 수 있었는데... 앞으로 나가기 무섭다고 여기서 꼬리를 내려버리면, 며칠 후 토론과 투표를 위해 재회할 언덕의 수도원에서도 같은 기분을 맛봐야만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좀 더 힘을 내서 어렵사리 굳혔던 결심을 지금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터.

즉석에서 세운 계획이 예상보다 빨리 진척을 보였다고 생각하자며, 뽀오옹은 크로덴에게 말 걸 타이밍을 잡기 위해 몇 번이고 그 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선배, 모처럼 같이 마시러 왔는데 다 같이 건배도 하고 그래야죠. 왜 청승맞게 혼자서만 마십니까?"

  

"난 원래 혼자 마셔."

  

"아니, 그래도 여럿이 같이 있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술자리에서도 이러시진 않을 거 아녜요."

 
"아마 그랬을걸. 너무 오래돼서 기억은 안 나지만."

  

"오래라니... 최근에 가셨던 술자리가 언젠데요?"

  

"전(前) 최강의 검 은퇴식."

  

"...그럼 회식하러 간다든가 끝나고 부하들이랑 가볍게 한 잔 한다던가 하는 건...?"

  

"최강의 검 되고 나선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아니, 대체 왜요?"

  

"임무에 방해돼."

  

다 같이 건배를 하는데 전혀 협조해주지 않는 크로덴을 설득하겠다며 곁에 붙어 앉은 뭉클리아가 열심히 조잘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효과는 보시는 대로. 

아무리 두들겨도 굳게 닫힌 문이 열릴 기미가 없자 이번에야말로 뭉클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뭐, 상대가 저렇게 나온다면 뭉클리아 경도 납득하...진 않더라도 이 이상 물고 늘어지진 못 하겠지.

뽀오옹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각자 알아서 자리 좀 지키다 일어나자는 뜻을 담은 눈초리로 뭉클리아를 힐끔거렸다. 제발 이 이상으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다 나가...

  

"그렇다면 더더욱 같이 마셔야죠! 분명 태양신께서도 이를 내다보시고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이 뭉클리아가 책임지고 두 분께 술자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드릴 테니 오늘 밤 모쪼록 함께 즐겨봅시다! 술은 제가 쏠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뽀오옹의 마음의 외침을 무시하고.

대체 어떻게 결론을 내린 것인지, 별안간 고개를 들어 오해가 잔뜩 섞인 주장을 단숨에 퍼부은 뭉클리아는 똥 씹은 표정의 뽀오옹과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크로덴이 그의 말에 채 반응하기도 전에 새 술과 잔을 가져오겠다며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언제 말을 꺼낼까 때를 엿보던 뽀오옹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뭉클리아 경도 벌써 취한 모양입니다. 뜻 모를 말씀을 하시나 싶더니 갑자기 나가버리시고..."

  

비싼 술로 가져오겠다며 뭉클리아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혼자 술을 따르는 크로덴에게 말을 거는 뽀오옹.

순간 고개를 쳐든 호기심에 말려들어 뭉클리아 경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냐고 물어볼 뻔 했던 자신을 제어하고 누구에게 던져도 무난할 관용구로 물꼬를 튼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아무리 취했다고는 해도 성국에서 미친개로 소문이 자자한 크로덴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허물없이 다가갈 배짱 따위는 없었으니.

  

"그, 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뭉클리아 경이 없으니 탁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심하며 텅 빈 머그를 몇 번 퉁겨 덕지덕지 지문을 묻혀놓던 뽀오옹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멎었다.

  

"사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선거 후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습니다. 뭉클리아 경...이라기보다 대사제님과 경쟁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까놓고 말해 크로덴 경과는 절대로 붙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나 혼자선 도저히 뭉클리아 경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고, 크로덴 경은 뭐...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표가 더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음... 우리 표를 한 데 모으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했다.

드디어 말했다.

살짝 버벅거리긴 했어도 실수 없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뭉클리아가 자리를 비워 좁은 공간에 크로덴과 단 둘이 있게 되었다는 현실과 마주하여 피어난 긴장감에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던 술기운이 단박에 가시는 듯 한 불길한 느낌에 서둘러 말문을 터트린 것이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다.

뭉클리아에게 붙을지 크로덴에게 붙을지 고민하던 뽀오옹의 등을 떠민 계기는 바로 술자리에 끌려오기 전 벌어졌던 작은 소란. 

과반수의 표를 쥐고 있으면서도 굳이 상대 후보와 언쟁을 치르면서까지 뭉클리아를 데려가려던 대사제라거나, (뭉클리아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대사제가 등장하자마자 대놓고 귀찮다는 티를 팍팍 풍기던 태도를 손바닥을 뒤집듯 바꾸고 뭉클리아에게 살갑게 굴어주고 이유야 어쨌든 자기 후보를 빼가겠다고 찾아온 대사제를 유려한 화술과 압도적인 기량으로 물러나게 만든 크로덴이라든가.

얼핏 보자면 사제들의 표를 쥐고 있는 대사제가 세운 후보가 이길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일련의 반응들이 뽀오옹으로 하여금 크로덴이 대사제보다 더욱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판단케끔 한 것이다.

  

"나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크로덴 경도 뭔가를 해보려고 출마하신 게 아닙니까. 나름대로 계획은 잘 세우셨을 거라곤 생각하지만, 그래도 뭉클리아 경이 가진 표를 무시할 순 없으니까 우리 둘이 힘을 합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처음과는 달리 뽀오옹은 상당히 부산스런 언행을 보이고 있었다.

술김에 용기가 올랐다거나, 크로덴과의 거리가 줄어들었다고 착각한 게 아니다. 뭉클리아가 나가고 나서부터 뽀오옹이 말을 거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크로덴에게서 받는 압박을 나름대로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

  

"......"

  

크로덴은 일방적으로 말을 늘어놓는 상대를 무심한 눈길로 응시했다. 말을 한 마디씩 늘어놓을 때마다 서서히 평정을 잃는 행색이 싫어도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자신이 무슨 대답이라도 해 줄까 하고 말이 끝날 때마다 약간의 사이를 두는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만약 여기서 크로덴이 뭐라고 대답을 해준다면 상대도 조금은 긴장을 풀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신경써줄 이유도 없을 뿐더러, 중간에 뭐라고 대꾸를 해줬다가 상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보라는 둥 관점을 달리 해보라는 둥 귀찮게 굴 것이 뻔하다. 첫인상대로라면 크로덴에게 그렇게까지 달라붙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으나, 상대는 현재 술기운이 들어가 돌발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상태니까.

상대의 기분 따위 전혀 헤아려줄 생각이 없는 크로덴에게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뽀오옹이 지칠 때까지 주절거리도록 냅뒀다가-

  

"...표는 전부 경께서 갖는 걸로 해서 후보 단일화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용없다고 봅니다만."

  

마침내 상대가 이쪽의 의중을 물어올 때, 최대한 단호한 어조로 짧은 대답을 던졌다.

  

"어... 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 선거에서 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닙니까?"

  

뽀오옹은 어둠이 드리우는 낯빛을 감출 새도 없이 크로덴에게 따져 물었다. 그의 반응을 예측하지도 못했고, 의중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초조함이 뽀오옹의 안색을 덮어 내렸다.

  

"왜 단언하냐니... 생각해보면 바로 답 나오지 않습니까."

  

예상대로 항의하는 뽀오옹에게 크로덴은 차갑게 말했다.

상대하기 귀찮아서 대충 대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산을 통해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신하고 내뱉은 발언이었다.

뽀오옹이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근거는 아마 과반수의 표를 쥐고 있는 로하가 대기실 앞에서 보였던, 크로덴에게 위축되어 평정을 잃은 모습을 목격하고는 로하보다 크로덴 자신에게 붙는 것이 보다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지. 물론 그 판단 자체는 틀렸다고 볼 순 없지만...

그 뒤에는 제3자가 알 리 없는 그들만의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과반수의 표 소유 - 당선이 유력한 후보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하가 크로덴을 경계하는 이유는 2가지.

하나, 임무 완수는 기본이고 늘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크로덴의 능력.

둘, 자신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경쟁 중인 상대도 나와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 믿어버리는 심리.

특히 2번째 이유가 로하에게는 냉정히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생각보다 물고 늘어지길래 아까도 살짝 운을 띄웠지만, 대사제의 목적은 뭉클리아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숨어 거하게 해 먹는다는 것이 분명할 터.

그건 알 바 아니지만... 물론 성민들에게는 좋지 않겠지만, 뭐어 남의 일이니까.

자신이 권력의 단 맛을 즐기기 위해 꼭두각시 성황 후보를 내세웠으니 상대도 같은 이유로 같은 성향의 후보를 내세웠을 거라고 단정하고 만 것이다. 성황의 제의를 받아들여 출마한 후보 역시 로하 자신과 비슷한 목적을 가졌을 거라 신봉하는 것은 덤.

거기에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크로덴의 성향이 더해져 그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거에서 이기고 말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고, 이는 단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해 본 적 없는 그의 명성과 맞물려 로하로 하여금 크로덴이 로하 자신이 꽉 쥐고 있을 것이 분명한 사제들의 표심을 뒤흔들 계략을 갖고 있거나 혹은 뭉클리아를 꾀어내 자기 입맛대로 부릴 계책을 떠올렸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만일 성황의 추천으로 나온 후보가 크로덴이 아니었다면, 혹은 크로덴이 권력이나 뇌물에 눈이 멀어 사제들에게 쉽사리 아부하는 유형이었다면, 로하가 크로덴을 필요 이상으로 주시하거나 선거 체계를 잠시 망각하고 그와 언쟁을 치르면서까지 대립각을 세우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뭐, 어설프게 머리가 좋아서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탓에 안 해도 될 걱정을 사서 하게 된 경우라고나 할까.

한쪽 세력에게 과반수의 표를 몰아주는 디오렌의 선거 체계 상, 후보 단일화를 통해 성황 표와 몽크 표와 성기사 표를 모두 합쳐도 과반수의 사제 표를 이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선거 체계를 바꿀 수 있을 리도 없다. 때문에, 대사제의 걱정과는 달리 선거가 예정대로 치러진다면 사제들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다음 성황이 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다만.

크로덴으로서는 현재의 선거 체계를 바꿀 능력도, 선거의 흐름을 비틀 생각도 없었지만, 상대가 알아서 오해를 해주겠다는데 이를 마다할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상대가 스스로 속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신경써 줄 까닭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같은 이유로. 

크로덴은 계산을 통해 도출한 결론을 뽀오옹에게는 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공간이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고는 해도 누군가 엿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자신이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덕에 후보 추천을 받을 수 있었던 뽀오옹이 대사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정 지을 근거 또한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이것저것 말해줄 의리 따위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거절했다가 지금처럼 들러붙으면 귀찮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단일화를 통해 표를 모아봤자 사제들을 이길 수 없단 사실을 말해줄 생각도 없다.

따라서 크로덴은 자신의 대답에 의문 부호를 떠올리는 뽀오옹을 향해 우회하는 방향으로 운을 띄웠다.

  

"성황께서 소장을 후보로 추천하셨으니 그 표가 어디로 갈지는 말 안 해도 아실 겁니다. 몽크의 표는 아무래도 좋으니 제쳐두고, 남은 건 성기사 표인데...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성기사들은 정치 활동이 일절 금지되어 있고 성기사단장들은 관례에 따라 최강의 검이 뽑은 후보를 똑같이 뽑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쪽과 손을 잡건 말건 크게 변하는 건 없겠죠."

  

크로덴이 흥미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일단 거짓말은 아니다. 최강의 검이 성기사 표를 쥐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물론 '성기사 표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딱히 댁과 손을 잡든 말든 바뀌는 게 없다'는 건 허울 좋은 의미일 뿐, '댁이랑 손을 잡아 모든 표를 모아봤자 사제들에게는 못 이긴다'는 쪽이 본심이기는 하지만.

  

"아..."

  

뽀오옹은 메마른 신음을 흘렸다.

'크로덴이 성황 후보로 선거에 나왔다'는 사실에 눈을 빼앗긴 나머지, '성기사 표는 최강의 검이 쥐고 있다'는 관례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다니.

뭐어, 관례를 철저히 따져보자면 성기사 표는 본디 '당선 가능성이 가장 적은 후보를 찍는' 최강의 검을 따라 뽑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크로덴에게 의표를 찔린 뽀오옹은 감히 이를 따질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선거 후보로 나온 자가 자신이 쥐고 있는 표를 경쟁 후보에게 쥐어 줄 리가 없으므로.

이번에야말로 뽀오옹은 말을 잃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권리를 넘겨주더라도 가능하면 자기 실속과 생색은 차릴 생각이었지만, 최강의 검은 그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다.

이젠 싫다.

실속이고 생색이고 아무래도 좋으니, 당선 가망도 없는 자리다툼 따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좀먹는다. 다른 말로 전의를 상실했다고도 할 수 있을 테지.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 선거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으니 크로덴 경 마음대로 하십시오."

  

뽀오옹은 한숨을 쉬며 백기를 들었다.

  

"그러시든지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투로 짧게 응수한 크로덴은 마지막 술 한 잔을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저기 하지만..."

  

뭔가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물론 상대할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뭉클리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추가 주문 받아오겠다고 나가서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선 분명 나갔다가 성민들에게 붙들린 걸 테지.

녀석을 빼내줄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만 일어나 보겠다며 크로덴이 굳게 닫혔던 문을 열어제낀 순간-

  

"그만하시오!"

  

술집 특유의 시끄러운 소음이 주변을 지배하는 가운데 갑자기 난입한 중년 사내의 불만 가득한 항변에 크로덴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술집에서 큰 소리가 오고가는 거야 흔한 일이었고,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누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신경 끄고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기막힌 타이밍에 들려온 목소리는 크로덴이 잘 아는 사내의 것이었다.

  

"크로덴 선배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감히 근거도 없이 최강의 검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겁니까? 오늘 크로덴 선배님과 함께하는 것은 대사제님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입니다! 좋은 뜻에서 하신 말씀일지라도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는 말씀은 솔직히 말해 매우 불쾌하군요. 저와 어울릴 사람은 제가 결정할 일이니 경은 나서지 말아주십시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감으로 봐선 최강의 검 욕이라도 한 거 같다만... 잠깐.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옷자락을 쥔 사내에게 일갈하는 뭉클리아를 본 크로덴의 마음에 작은 의혹이 일어났다.

녀석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뭉클리아의 성격 상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얌전하게 대사제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었을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혹시 대사제의 의도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움직이는 건 아닐까, 하고.

어느 쪽이든 크로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조금 더 있어볼까.

크로덴은 마음을 돌려, 선약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겠다는 뭉클리아를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시 후, 양팔 가득 술병과 잔을 껴안고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뭉클리아는 사과와 함께 배시시 웃었다. 

크로덴이 목격했던 진지한 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순박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다. 

다만.

순박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그 얼굴에는 뭉클리아가 방 밖으로 나갔다가 무슨 일을 겪었다는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 잠시 크로덴의 시선이 발갛게 물이 오른 뭉클리아의 얼굴에 머물렀다.

화를 낸 여파 - 는 아닐 것이다. 뭉클리아가 탁자로 다가올수록 진하게 풍기는 술내음으로 봐선, 부주의하게 홀로 방 밖으로 나갔다가 몰려든 성민들이 내민 권유를 뿌리치지 못 하고 한 잔 두 잔 받아 마시다 취기가 오른 거겠지. 안 봐도 훤하다.

다만 마지막에 뭉클리아에게 달라붙던 녀석은...

  

"뽀오옹 경이 많이 취했나 보네요."

  

무심코 생각에 잠긴 크로덴의 옆에서, 딱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입에 담는 뭉클리아.

뭉클리아의 시선의 끝에는 탁자 한구석에 엎드려 약하게 코를 고는 뽀오옹이 있었다.

  

"뭉클리아, 넌 왜 선거에 나온 거지?"

  

크로덴은 뭉클리아가 직접 새 술을 따라 내민 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냐뇨... 당연히 디오렌을 개혁해 성민들의 삶을 보살피기 위해서죠. 선배님도 아까 회장에서 제 연설 들으셨잖아요?"

  

뭉클리아가 멍한 어조로 답했다.

  

"연설이라... 그럼 진짜였나 보군?"

  

"진짜라니요?"

  

"그냥 대사제님께서 준비하신 양피지를 따라 읽기만 한 줄 알았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셨다니 너무하십니다, 선배님. 그야 제 글재주가 형편없어서 대사제님께 초안을 부탁드린 건 사실이고, 대사제님께서 보여주셨던 초안이 꽤 그럴 듯해 보이기에 '손볼 거 없이 그냥 이대로 갖고 나가서 읽어도 되겠당' 하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연설 내용은 진짜 제 생각이... 랄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크로덴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뭉클리아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지나친 생각이었나...

뿌우 하고 볼을 부풀리는 뭉클리아를 한 대 쥐어박아야 하나 고민한 것도 잠시, 크로덴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 녀석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성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을 뿐이고, 대사제 혼자서 눈독을 들여 꼭두각시로 내세우려던 게...

  

"...선배님,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자기, 뭉클리아의 낮은 목소리가 지나친 생각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려던 크로덴의 발목을 붙들었다.

  

"사실 술 마시러 가자고 두 분을 부른 것도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뭐, 뽀오옹 경은 주무시고 계시니 무리겠지만..."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까는 후배를 미심쩍은 눈길로 붙잡은 크로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잔에 가득 채웠던 술을 단숨에 비운 뭉클리아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에서 대사제님께서 주신 연설문을 그대로 읽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성국을 개혁하겠다는 건 진심입니다. 허나 성기사단장 혼자선 성국을 바꿀 수 없겠죠. 그래서 대사제님의 힘을 빌려 선거에 나오게 된 겁니다. 성황이 되어 디오렌을 개혁하고 성민들의 삶을 보살피기 위해서!"

  

"그러냐."

  

"그렇습니다!"

  

크로덴의 영혼 없는 동조에 힘입어 뭉클리아는 벌떡 일어나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로하 대사제님의 소문 중에 그다지 듣기 좋지 않은 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찾아오신 대사제님께서 지난날을 반성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성국을 바꾸는데 일조하시겠다고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사제님과 손을 잡게 된 거죠."

  

-그건 니 생각이고.

목이 탔는지 따른 술을 단숨에 비우는 뭉클리아를 향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중얼거리는 크로덴.

반평생을 사는 동안 아무 계기도 없이 사람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가치관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리도 만무하고, 애초에 대사제가 성국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보다 비밀리에 일을 추진했을 터. 디오렌에 사제들의 입김이 성국을 쥐락펴락한다는 독특한 속성이 존재하는 한, 그들을 거스른다면 쇄신이든 현상유지든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다만. 뭉클리아의 지금 상태로 봐선 대사제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으니 속은 거라고 설명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바로잡아줄 생각도 없지만.

  

"그러니까 선배님. 만약 제가 성황이 되면, 절 좀 도와주십시오."

  

크로덴은 뭉클리아의 다음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대사제에게 속아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녀석이 왜 내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거지?

  

"디오렌을 바꿔나가는데 선배님의 힘도 빌리고 싶습니다."

  

"무리다."

  

딱 잘라 대답하는 크로덴.

일순, 뭉클리아는 벙찐 얼굴로 크로덴을 바라보다... 난데없이 그의 방향으로 쑥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무리가 아닙니다! 저도 알아요. 선배님은 정치에는 일절 끼어들지 않으시지만 위에서 내린 명령과 주어진 임무만큼은 완벽히 처리하신다는 걸요. 혹시 사제들의 반대를 염려하는 거라면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대사제님께서 지난날을 뉘우치셨으니 사제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함께 손을 잡고 성국을 바꿔가자며 뭉클리아는 크로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약 자신이 낙선한다면 그 때는 자신이 크로덴을 보좌하겠다는 말을 덧붙여서.

그에 대한 크로덴의 대답은...

  

"난 지킬 수 없는 약속 따윈 하지 않아."

  

뭉클리아가 내민 손을 뿌리치는 거절의 말. 

살짝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내포한 의미는 뭉클리아에게도 충분히 전해졌을 테지.

  

"...알겠습니다."

  

예상 외로, 뭉클리아는 크로덴의 의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선배님의 의사를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허나! 만약 제가 성황이 된다면, 그 땐 선배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선배님을 제 곁에 두겠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척 하고 검지를 크로덴에게 향해 선전포고를 날린 뭉클리아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그래도 속이 쓰렸던 건지, 아니면 자기 속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전부 쏟아놓아 마음이 가벼워진 건지 알 길은 없지만.

괜히 시간낭비나 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크로덴은 먼저 가겠다는 한 마디만을 던진 뒤, 뭉클리아가 뭐라 채 대꾸하기도 전에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마음에 안 들어.

크로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하여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무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일을 팽개치고 온 듯 한 찜찜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았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돈이 부족한데요..."

  

술값을 치르기 위해 계산대로 나온 크로덴에게 술집 주인이 공포가 어린 눈동자를 아래로 떨군 채로 쭈뼛쭈뼛 말을 걸어왔다.

  

"버본 한 병 값이 맞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머지 술이랑 안주 값이..."

  

"나머지는 먹은 사람들에게 알아서 받으시오."

  

크로덴은 눈을 마주치지 못 하는 주인을 향해 손짓으로 뽀오옹과 뭉클리아가 머무는 중인 방을 가리키며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예."

  

크로덴의 말에 설득당한 건지, 크로덴을 상대로 이 이상 항의할 근성이 없었던 건지. 

술집 주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는 발길을 돌렸다.

문턱으로 나아가는 순간 개방된 나무 탁자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자신과 엇갈려 움직인 사람이 어쩐지 자신이 나왔던 방을 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