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URODEN/미친개(fanfic)

조소하는 자의 자리 (1)

by 부야카샤 2019. 10. 2.

지상에 내린 신의 성총이 저주로 바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례없는 위세를 떨치던 더위도 끝자락에 다다른 어느 날, 신성국가 디오렌을 다스리는 성황의 저택.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고급 송아지 스테이크와 마튼 산 와인으로 배를 채우고 식후 땡을 겸해 제국 산 최상급 시가를 꺼내든 성황의 주름진 얼굴에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떠올라 있다.
먹고 싶은 것은 언제 무엇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사람도 술도 담배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다.
가끔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발칙한 미물들이 기웃거리고는 있지만, 성국 역사상 가장 일 잘하는 미친개가 전방에 버티고 있는 이상 그 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뭉클리아 놈이 가끔 속을 긁어놓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기도 하고...
성국의 모든 이들이 성황을 칭송한다. 성기사들도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다.

 

“나는 최강이다.”

 

지나치게 감성에 젖은 탓일까.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던 본심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모두가 이 나를 우러러보고 모두가 내게 충성의 맹세를 한다. 극락이 뭐 별건가. 성황이 누리는 지위와 특권, 이것이 바로 극락일 터였다.

 

“어이쿠.”

 

아주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갑자기 복부에 경미한 통증을 느껴 순식간에 의식이 각성한다. 근자에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냥 나오는 일이 늘었는데, 혹시 5일 만에 찾아온 희소식인가 싶어 서둘러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타이밍을 놓쳤다간 또 얼마나 오랫동안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덜컹.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로하 대사제가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아주 잠시, 평화롭던 공기를 가르고 안으로 들어선 자는 다름 아닌 현 성국의 실세인 로하 대사제였다.
성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성황이지만, 실제로 성국을 쥐락펴락하려면 사제들의 입김이 불가결하다. 사제들에게 있어서도, 본인들의 입맛에 따라 성국을 바꾸기 위해선 성황의 자비가 절실한 것이 현실.
이 때문에 성황과 사제들은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례는 성황과 로하의 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네가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별일이구만.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게나.”

 

싫은 내색 없이 얼굴 가득 환영의 의사를 드러내며 로하에게 자리를 권하는 성황의 태도가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평소 같았으면 신호가 온 시점에서 방문한 사람이 시종이나 성기사였다면 어디 감히 연락 없이 이 곳을 찾느냐며 역정을 냈겠지만, 서로의 뒤를 봐주며 함께 배를 불려온 대사제가 그 방문자라면 어찌 감히 함부로 물릴 수 있겠는가.

 

“성황 폐하,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온지요.”

 

로하는 성국 식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는 대신, 능글능글한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성황의 안부를 묻는 인사를 올린다. 그 말 속에 살짝 뿌려진 조소의 기운을, 안타깝게도 성황은 눈치 채지 못했다.

 

“아 뭐... 별 일은 없네. 평화롭고 등 따습고 아랫놈들은 고분고분하고... 평온 그 자체라네. 물론 자네가 열심히 뒤에서 힘써주었기 때문이네만.”

 

너무 평화로워서 따분할 지경이라는 뒷말을 가까스로 삼킨 성황은 서둘러 로하를 칭찬하는 미사여구를 급히 끼워 넣었다. 이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일종의 처세다. 아마 자신이 이렇게 물꼬를 틀어주면 로하가 그 뒤를 받아 서로 덕담과 뇌물... 다시, 서로의 친목을 다지고 우애를 돈독히 하기 위한 성의 표시를 주고받은 뒤 이 짧은 유희는 막을 내릴 터...였는데.
성황의 예상과는 달리, 로하는 그가 친히 따라 준 와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댈 뿐 도무지 답례를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말일세, 내 자네만 있어 하는 말인데... 요새 너무 잘 먹어서 그런 건지 조금 불편한 점이 생겼더구먼. 아직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네만... 자넨 좀 어떤가?”

 

평소와는 달리 말을 아끼는 로하의 태도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성황은 공통(?)의 화제를 찾아 다시 말을 걸었다. 실세라고는 해도 명백히 성황 발아래 있는 사제의 건방진 태도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어쩌겠는가.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자신이 참고 다독여야지.

 

“성황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로하가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으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왜 질문에 대한 답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싶어 로하에게 눈을 부라리려던 성황은 그제야 눈치챘다. 로하의 능글능글한 미소가 진작에 자취를 감췄다는 걸.

 

“성황께서도 이제 건강을 챙기셔야 할 때 아닙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고기만 찾아 드시기보단 조금 체중조절을 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식이요법도 겸해서 말입니다.”

 

“뭣...!”

 

마지 오늘 저녁 반찬은 뭐로 할 건지 묻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툭 내뱉는 로하의 행색에 성황은 감정을 제지하지 못하고 분노의 빛을 떠올렸다.
어투는 바르지만 대사의 내용은 충분 이상으로 난폭하다.
근본적으로 무신경한 타입이라면 몰라도, 고위사제 의문의 살인사건 후 권력을 잡아 실권을 독점해 온 로하가 이렇게 대놓고 무례한 태도를 취할 리가 없다.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뻗대는 것인지, 그 의중을 파악하지 못 한 성황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발갛게 물들인 얼굴을 삭히고 그의 속내를 파내는 것뿐이었다.

 

“듣자하니 너무 방자한 것 아닌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어떻게든 억누르긴 했지만 핏대를 세운 목과 불쾌함이 스며 나오는 목소리에서 흐르는 분노까지는 막을 길이 없다. 성황 본인조차 그리 느꼈는데 로하가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터.

 

“성황폐하, 오해 마시길. 저는 단 한 번도 성황께 방자한 언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방금 제 태도에서 폐하가 뭔가를 느끼셨다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뭐라...?”

 

전개를 따라가지 못 한 성황은 벙찐 표정을 떠올렸다. 이노무 자식이 지금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농담이 지나쳤군요.”

 

암만 머리를 굴려도 속내를 파악할 지혜를 얻을 수 없어 고뇌에 빠진 성황을 구하려는 듯, 로하의 너털웃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방금 날 상대로 재미도 감동도 없는 농을 건 거냐며 성황이 따져 물으려는 순간-

 

“아무래도 에둘러 말하면 성황께서 못 알아들으실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후세를 위해 그만 물러나 주시지요. 성황 폐하.”

 

“...?!”

 

로하가 날린 돌직구를 성황이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완벽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말을 잃은 성황을 향해 로하는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 갑자기 물러난다면 사제들이 반대표를 던질지도 모르니까, 성황께서 잘 다독여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변비도 심하시고 하니, 요양을 겸해 후세에게 뒷일을 맡긴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뭣하면 은퇴 문구는 제가 생각해드릴 수 있...”

 

“이 은혜도 모르는 새X가!”

 

쨍그랑!
벽에 거세게 부딪힌 유리잔이 깨져 안에 든 내용물이 유리 파편과 함께 사방팔방 튀어나갔다.
재빨리 잔을 피한 로하는 힐끗 고개를 돌려 깨진 잔과 벽과 카펫으로 튄 와인의 잔해에 눈길을 주었다가... 거짓 웃음의 베일마저도 싹 걷어내 버렸다.

 

“죽어버려 이 개X식아! 네 놈이 내게 받은 게 얼마인데 이딴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전 폐하의 뒤통수를 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건강이 나빠지신 폐하가 성국을 위해 몸을 혹사하시는 걸 더 이상 볼 수 없어 젊은 피를 수혈하려는 것뿐이죠. 이 모두가 디오렌을 위한 겁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폐하의 뒤통수를 친다고 표현하시는 겁니까?”

 

“닥쳐 이 X새X야!”

 

분노로 몸을 떨던 성황이 마침내 화를 참지 못하고 로하에게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성황이 울분을 담은 주먹을 크게 휘둘렀지만, 이를 가뿐하게 피한 로하는 다리를 걸어 자신에게 다시 달려드는 성황을 손쉽게 넘어뜨렸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폐하. 이리 난동을 피우시면 폐하를 염려해 저 혼자 폐하를 찾은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로하는 성황이 몸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여 음산한 어조로 뒷말을 속삭였다.

 

“아랫것들이 이 꼴을 봐야만 폐하의 속이 풀리시겠습니까? 밖에 제 심복들이 있으니 그리 원하신다면 그들에게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로하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그리고 말이죠... 성황께서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랫것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뭐...!”

 

무슨 되도 않는 협박질을 하느냐며 다그치려던 성황은 그의 뒷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이 새X... 설마...”

 

“오해하지 마십시오. 드물긴 하지만 변비로 고생하다 기절하는 사례가 있기도 해서 노파심에 드린 말씀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기우에서 드린 충언이니 노여워하지 마시길.”

 

“헛소리 작작 해 이 빌어먹을 자식아! 누구 맘대로 성황을 갈아치운다는 게냐! 뭣보다 난 아직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

 

풋.

 

로하는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능력도 없는 게 감당도 못 할 성황 자리에 앉아 그만큼 해 먹은 걸로도 모자라, 아직도 부족하다고?
제3자 입장에서 보자면 대사제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본래 인간이란 제 허물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면서 남의 허물은 죽을 때까지 쫓아가 따지는데 혈안이 된 존재니까.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주시할 수 없다니 슬픈 일이로군요. 폐하께서 좀 더 가치가 있는 인재였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나오진 않았을 겁니다만... 아, 생각해 보니 그걸 아시는 분이라면 이렇게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겠군요. 깜박했습니다.”

 

제 할 말을 마쳤다고 판단한 로하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조만간 좋은 소식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성황 폐하.”

 

“못하겠다면?!”

 

붉은 사제복이 바닥에 끌리던 소리가 멈췄다. 로하는 흡사 버려진 애완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성황을 응시했다.

 

“못 하시겠다면 이번엔 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찾아가 면담을 요청할 겁니다. 저도 성황께서도 그리 되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 서로 좋게좋게 해결하시죠. 어디 잘못 부러지기라도 했다간 뼈도 못 추릴 연세 아니십니까.”

 

“웃기지 마라! 네 녀석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당장 믿을 만 한 성기사를 불러다 네 놈을 조져버릴 테니까!”

 

“믿을 만 한 성기사가 대체 누구요?”

 

통할 거라 생각하고 날린 성황의 최후통첩에도 로하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되묻자 도리어 성황 쪽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일반 성기사는 아닐 테고, 제가 매수한 성황기사단도 아닐 터이고, 세날 공작부인에게 대가 끊긴 늑대기사단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럼 무능하기로 유명한 개기사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불의를 보고도 나 몰라라 하는 붉은 사자 기사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설마...”

 

입을 다문 성황 대신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경우의 수를 늘어놓던 로하는 일부러 말을 끊고 잠깐 시간을 흘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짐짓 꾸민 듯 한 어조로.

 

“성국 전체에서 한 목소리로 손가락질하는 전국적 왕따인 미친개를 말하는 건 아니시죠?”

 

이겼다.
말을 잃고 고개를 숙여 분노를 감추려는 성황을 바라보며 로하는 승리를 확신했다.

 

“...뭉클리아.”

 

“네?”

 

속삭이는 어조로 한 마디를 읊조리자 로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왕을 퇴치한 공로로 지금 성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뭉클리아! 그 놈을 끌어들이면 네놈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거다!”

 

회심의 일격이다.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저 꼬라지하고는.
아주 잠시, 성황은 건방진 로하 놈을 한 대 갈기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의문을 떠올린 로하가 별안간 배가 빠지도록 웃기 시작하기 전까진.

 

“아하하하하! 이거 심사숙고해서 갈긴 한 방이었을 텐데 죄송해서 어쩝니까.”

 

눈물까지 흘려가며 어깨를 들썩이던 로하가 이내 말문을 텄다.

 

“그러고 보니 아직 폐하께 말씀을 안 드렸었군요. 어째서 성황을 내치고 젊은 피를 수혈하려는지를.”

 

“너... 설마?!”

 

“예, 그 설마입니다. 낡고 시어빠진 늙은 성황보다는 살신성인으로 마왕을 무찌르는데 일조한 뭉클리아를 성민들이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성민을 위해 디오렌을 개혁해 볼 생각 없느냐고 슬쩍 떠봤더니 바로 넘어오더군요. 성황께서 손을 쓰시기엔 이미 늦었으니 그만 포기하시죠.”

 

쨍강!
그럼 부디 안녕하시기를, 이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나가버린 로하의 뒤로 다른 유리잔이 날아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로하 이 X자X!"

 

혼자 남겨진 성황은 혼란이 깃든 표정을 거둘 새도 없이 발작처럼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죄다 집어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와인잔, 담뱃대, 임명장, 제국 산 양주 등 그의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아스러지는 비명을 토했다.
그의 분노가 유리잔이 날아오기 직전 문을 닫아버려 로하에게는 아무 상처도 줄 수 없었다는 실망감 때문인지,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잘 먹고 잘 살던 자신의 처지가 극락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현실에 대한 슬픔 때문인지, 영원한 밀월관계일 줄 알았던 로하가 난데없이 자신의 통수를 친 데 대한 격노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전부 다일지도.

 

“폐하, 이게 다 무슨...?”

 

뒤늦게 달려온 시종이 씩씩대는 성황에게 머뭇머뭇 말을 걸자 있는 물건들을 전부 깨부숴서 화를 다스리던 성황이 다시 폭발하고 말았다.

 

“닥치고 당장 나가, 이 X새X야!”

 

“시... 실례했습니다!”

 

시종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성황의 옆에 있다간 화풀이 대상이 되어 얻어맞을 거란 사실만은 인지할 수 있었다. 모든 생물의 내면에는 생존 본능이라는 녀석이 살면서 주인에게 끊임없이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니까.

 

“허억, 허억...”

 

광분한 얼굴로 시종을 쫓아내고 더 이상 깨부술 물건들도 존재하지 않으며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흡사 피를 뒤집어쓴 것 마냥 붉은 정복이 땀투성이가 됨과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기력을 전부 소진한 성황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설령 자신이 이대로 성황 자리에서 쫓겨난다 해도, 자신을 물 먹인 로하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받은 만큼, 아니 이자까지 쳐서 되갚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뭉클리아는 이미 로하가 선점해 버렸다. 성황의 권력으로 데려와 설득시킨다 한들, 이미 성민을 위해 디오렌을 개혁하자는 로하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이상 성황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설득할 수 있다 해도, 로하 놈이 나 때문에 성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해버리면 멍청한 뭉클리아 놈은 그 말을 덥석 믿어버리겠지...”

 

성황은 자조 섞인 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가진 것을 전부 부수고 나서야 냉정함이 찾아오다니 이 무슨 얄궂은 일이란 말인가.
생각하자.
성황은 텅 비어버린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제들은 전부 로하 편을 들 테니 그 쪽으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나마 기사단 중에서 가장 걸어볼 만한 타오라 활활도 최강의 검 시합에서 두 번이나 떡실신되어 실려나간 후 성국 정치에서 손을 떼고 만 탓에 도와달라고 해봤자 정치싸움에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거절할 것이 뻔하다. 몽크들도 일반 성기사들도 마찬가지.

 

“그 수밖에 없나...”

 

성황은 이를 악물었다.
이 수는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아니, 꽤 높은 확률로 자신과 로하 모두 패가망신할 수도 있는 수다.
패가망신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어쩌면 말 그대로의 의미로 죽을지도 모르...
...아니, 로하는 몰라도 성황인 자신은 죽을 리가 없다.
한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성황을 그렇게 쉽게 죽여 버릴 리가 없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걸 잃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터.
로하가 하자는 대로 따른다고 해서 로하가 자신을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로하 놈을 한 대 갈겨 줄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 이상, 성황이 선택할 수 있는 수는 하나밖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
-좋아, 한 번 해 보자.
오랜 고민 끝에 성황은 결정을 내렷다.
미친개와 손을 잡자.
정치판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한다지만, 성국의 왕이라면 그 괴팍한 녀석도 생각이 달라지겠지. 성황이 되는 것을 도와준다면 녀석도 그리 심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로하보다는 덜 때릴 터.
...아마도.
지금까지 쌓아올린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건 가슴 아프지만... 이대로 로하에게 밀려나 벼랑으로 몰리는 거나, 성황이 된 크로덴이 개혁으로 부패와 비리를 척살하겠다며 두들기는 거나 성황에게 있어선 그게 그거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로하 놈에게 한 방이라도 먹이는 편이 낫지.
성황은 손바닥에 무게를 실어 책상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독여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친개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고, 그 깐깐하고 절대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악마 같은 수장을 어떻게 설득할지 감도 안 왔으며, 미친개를 이 곳으로 불러들일지 아니면 직접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최전방에 걸음을 해야 할지 결정내리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뭔가를 부탁하는 입장에서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뇌물... 다시, 인간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사회에서 허락하는 작은 성의조차 거부해 버리는 꽉 막힌 독불장군을 어떻게 구슬러야 할지 걱정이 앞선 탓이다.
...아니,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르겠다.
미친개가 안 받는 게 문제가 된다면, 받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노고를 치하한다는 격려문을 담아 고위 성기사단장 12명에게 전부 같은 걸 보낸다면 그 미친개도 받을 수밖에 없을 테지.
전부 성황의 사비로 낼 수밖에 없겠지만... 로하의 목을 조르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못 낼 것도 없다. 게다가 임무를 완벽히 처리해도 변변한 보답 하나도 제대로 못 받던 미친개라면 의외로 기뻐하여 성황이 시키는 대로 따를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너무 앞서나간 건지도 모르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로군...”

 

성황은 발을 휘저어 분을 못 이기고 부숴버렸던 쓰레기 잔해들을 쓸어가며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나아갔다.
로하놈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늑장부려서는 아니 된다. 하루라도 빨리 미친개와 손을 잡아 로하에게 맞설 체제를 구축하여야만 하니까.
서둘러야만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성황은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흐트러진 붉은 정복에서 성황임을 강조하는 휘장이 바닥에 떨어져 잔해 속에 섞여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

 

작 중 시기 : 1기에서 마왕을 퇴치한 후 ~ 뭉클리아가 성황으로 당선되는 선거 이야기

즉, 여기서 등장하는 성황은 뭉클리아가 즉위하기 전의 성황입니다. 1기에서 뭉클리아 때문에 골치를 썩고, 뭉클리아가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라며 늑대기사단장을 보냈던 그 성황이죠.

처음엔 371화에서 뭉클리아에게 잔소리를 하는 크로덴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정도로만 구상했었는데... 이것만 쓰면 뭔가 부실한 것 같아 조금씩 살을 붙이다 보니 어느 새 성황과 로하의 대립구도까지 와버렸습니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371화에서 (뭉클리아가 성황으로 당선되는) 선거의 후보자들이 나왔는데 왜 크로덴이 성황 후보로 나왔을까??
크로덴이 성황 자리에 관심 없다고 말한 걸로 봐선 본인이 직접 입후보했을 리는 만무하다 - 즉 성기사들의 추천을 받아 나온 건 아니겠죠. 추천받아봤자 빛의 검이 싫다고 하면 그만이니.
또 이 때는 아직 로하가 중앙/지방 사제 권력들을 꽉 잡고 있었으므로, 로하는 후보 추천권을 써서 자기 입맛에 맛는 후보를 내세웠을 겁니다. 그게 바로 뭉클리아고.
성기사 추천도 사제 추천도 아니라면 남은 건 성황 추천권 뿐이므로, 크로덴은 성황 추천으로 입후보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마도 타의로.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히메/킹메에서 성황 선거가 두 번 치러졌는데 2번 후보는 모두 사제의 추천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었고, 3번 후보로 나온 괴이체 역시 성황 뭉클리아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니, 아마 누구의 추천을 받느냐에 따라 기호가 고정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그럼 왜 타의로 크로덴이 후보로 나왔을까를 고민해 봤는데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게 바로 로하와 전 성황의 대립 구도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뭉클리아라는 새 허수아비를 찾은 로하가 늙고 시어빠진 전 성황을 내쳤다 → 빡친 성황이 뒷일이야 어찌 되든 로하를 물어뜯으려고 크로덴을 끌어들였다 → 그래서 정치에 관심 없던 크로덴이 후보로 나왔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래봤자 패러디일 뿐이지만...ㅋ